친애하는, 작은 영웅에게.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 가득 차오르는 뜨거움은, 벅차오름과 곧잘 혼동되고는 하지. 이 벅차오름이란 네가 내게 알려주었던 그것이기도 하다.
네가 나를 향해 겨누었던 총구의 끝을 아직도 기억한다. 슬슬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가는가 싶더니, 다시금 빛나기 시작하는군. 평생을 그리움 같은 건 모른 채 살아온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나보구나. 너로부터 배운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잘 지내고 있는가. 이런 글이 아니고서는 네 소식을 알 방도가 없다는 게 참으로 아쉽군. 이 편지의 첫 문장은 그 학자가 정해주었다. 네게 쓰는 편지라고 밝히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뜨거움'이라는 단어에 별다른 뜻은 없다. 지금 이곳은 타들어 가는 듯한 무더위로 가득하지. 그뿐이다.

 늦었지만, 네가 혼돈을 거두어 갔음에 큰 감사를 표하고 싶다. 다 지난 일이라고 치부하지는 말아주었으면 좋겠군. 이 글도 일차적으론 그를 위해 쓰이고 있으니. 당시의 우리는 서로 인사를 주고받을 만한 경황도 없잖았는가. 너는 말 그대로 게이트 속에서 빛이 되었으니 말이지. 덧붙여, 네가 네 세계에 잘 도착했는지, 우리 쪽에서는 알 방법이 없었다.
 너를 보낸 후의 얘기를 조금 해주자면, 세계를 다시 일궈나가기란 내 생각보다도 더 벅찬 일이더군. 우린 겨우 두 사람뿐이었으니까. 게다가 나는 수호자로 사는 삶을 버린 지 오래였을뿐더러... 애초부터 그런 쪽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런 내가 마지막 인류라니. 별로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허탈감? 뭐 그런 것들을 느꼈던 것도 같군. 확실히, 이런 감정과 너 같은 영웅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
물론 허탈감만이 행동의 모든 이유는 아니었다. 생각해 보아라, 가이. 모든 인간의 최후에는 허무함이 있다. 그러나 나와 학자가 겪고 있는, 그리고 겪게 될지도 모를 허무함은 좀 다른 결이다. 내가 죽은 후에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음은 당연한 일이 아니다. 이건 내가 이 세계를 재건하겠다고 결심한 이유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나는 학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다.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도 있으니 말이지. 그러나 그는 뭐라고 말도 하지 않더군. 넋 나간 사람처럼 굴었다. 아니지, 이미 그는 넋이 나간 지 오래. 단순히 너를 향한 감사와 애정이 펜을 움직이게 한 것이라면 참 좋았을 텐데.

 무엇이 그를 괴롭게 만들었을까.
내게 이 문제는 세계를 재건시키는 것보다도 중요한 건이 되었다. 결국 너와 그자의 도움 없이 세계 단위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의 도움이 필요했으니 말이지.
그의 상태는 생각보다 꽤 심각했었고, 나는 깊이 고민하는 수밖에 없었다. 과거형으로 적었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은 채다. 현재진행형이라는 말이 좋겠군. 머리 쓰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지만, 내게도 직감이라는 건 있었다.
 사실 너와의 두 번째 만남이 이뤄지기 전부터, 그가 이상한 낌새를 보이곤 했었다더군. 꽤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듯싶지. 다른 수호자들의 말을 전해 들었었다. 하지만 내 두 눈으로 확인한 것도 아니었고, 이 세계의 안녕 따위는 더 이상 내 관심사가 아니었기에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지 못했었다. 그때 좀 알아뒀으면, 지금의 일을 처리하기 좀 더 수월했겠군. 네게 물어보기라도 했었어야 했나.
 창조주의 구슬, 기억하는가? 그건 어찌 보면 이 세계를 굴러가게 할 도구이면서 동시에 저 불쌍한 학자의 유일한 동력원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티팩트 하나 때문에, 원래의 성격을 죽이고 네게 다정하게 굴다니. 카운터펠트라고 했던가, 그자는 베켓에게 있어 확실한 구원이었던 것 같군. 보통의 피조물이라면 이제 질려버린 이름이로서니 모두가 그러란 법은 없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절망적인 중얼거림이 들려온다.
 그렇게 치면, 그에게 있어 너는 꽤 눈엣가시였겠군. 누가 누굴 얼마만큼 원망했고, 얼마만큼 저주했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논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 땅의 마지막 지인이 무너지는 모습을 그냥 지켜봐야 하는 것은, 그보다도 더 마음을 괴롭히는구나. 베켓은 간간이 너를 찾고는 한다. 좋은 의미는 아니다. 아마 그자가 네게 승리하고, 이 땅의 모든 생명체를 다 쓸어버렸어야 그는 진정으로 웃을 수 있었을 테지.
물론, 내가 모르는 저 두 사람의 관계, 특히 그자를 향한 베켓의 생각 등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건 다름 아닌 너였다. 너는 이미 내가 말한 모든 것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재차 묻고 싶구나. 어떻게 생각하는가, 영웅이여. 뭐, 처음부터 네 선택에 의한 구원이 아니었으니 네가 모든 짐을 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동정한다는 뜻이다.

 알고 있겠지만, 네가 세상을 지켜냈다고 보는 자들이 있는 만큼, 네가 세상을 망가뜨렸다고 보는 자도 있었다. 그자를 봉인시킨 우리를 공격했던 것 또한 너였으니까. 나는, 그 모든 의견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누가 어떻게 됐는지보다, 네게 그럴 만한 힘이 있었음이 내게는 더 중요하다.
그러나 더 나은 방안이 아예 없었던 건지에 대해,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고민하지 않았음에 대해서는 후회스럽다. 카운터펠트는 패배했지만, 그건 그자의 패배가 아니다. 네 승리다. 역설적이게도 그자는 우리를 상대로 패배한 적이 없다. 지금 이 꼴을 보니 더욱 확신이 간다.

 가이, 너는 분명 옳은 일을 했다.
그러니, 다른 생존자들이 네게 무슨 말을 했는지 간에 이 세계의 불화에 대해 크게 마음 쓰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의 창조주라는 자격을 달고 있는 자가 카운터펠트인 이상, 이 세계의 일은 이미 결정 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네 잘못이 아니라는 의미다. 오히려, 너와 같은 아이에게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바란 것이겠지.
 네가 떠난 후, 난 여러 고민을 해왔다. 대부분은 쓸모없는 고민이었지만,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 사실 이것을 알려주기 위해 펜을 잡았다고 해도 무방하겠군. 우리는, 적어도 나는 이런 고민 아래 행동해본 적이 없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너도 마찬가지다. 왜 한 쪽의 말만 듣고 움직였냐며 너를 가르치려는 게 아니다. 나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기에. 그러나 너는 영웅이잖은가. 한 번 정도는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나.
네게 구원받은 자가 네게 해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도움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군.

 이제 와서 너 혹은 그자를 다시 이 세계로 불러옴이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너는 어디까지나 그의 폭력적인 태도를 저지하기 위해 소환된 존재이니 말이다. 남은 자들의 일은 남은 자들이 해결해야 하리라. 이 편지가 네게 닿든, 닿지 못하든 너는 네 세계에서 아이답게, 영웅답게 행동해주면 그만이다.

 펜을 너무 오래 쥐었더니, 손가락 마디가 아려오는군. 역시 나는 싸움꾼 같은 것이 체질인가 보구나.
이만 말을 줄이겠다.

더위 조심하도록 해라.

라크리스.

 추신. 그런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혹여 그자와 재회하게 된다면 베켓을 기억하고 있느냐고 묻지 마라. 온전히 잊히는 것이 더 나아 보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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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뜰아 아무리 생각해봐도 일 다 끝난 후에 제정신인 놈은 베켓이 아니라 라크리스일 것 같애 음...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과학자인 주제에 신 믿다가 세상 날릴 뻔했다는 걔는 믿음이 자신의 전부였을 거라고 생각해 나는... 뭐 라크리스도 그다지 깨끗한 정신은 아닐 것 같지만 그나마...?
재앙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거라곤 두 사람밖에 없는 거네... 가이도 제 세계로 돌아갈 것이 뻔하고 카운터펠트는 또 추방당했으니까... ... 굳이 이랬어야만 하는지 다른 좋은 방법은 없었던 것일지 라크리스는 그닥 머리 쓰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고민을 할 수 있는 건 이제 얘밖에 없는 거네...
2에서의 수호자들은 나눠가진 카다섯글자의 힘을 빼앗길 수 없었기 때문에 가이를 막았던 거고 3에서의 라크리스는 힘을 겨뤄보고 싶어서 싸움을 건 거라면 아니 그것보다도 가이를 원망하지는 않았던 걸까?
스트라이더는 지옥에서 기다리겠다고까지 말했는데 카다섯글자가 아니라 가이가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고 본 게 아닐까... 이미 이런 해석을 한 사람이 있는데 라크리스라고 걔를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생각이 깊은 건지 모르겠다 얘는

@Waiting4Surnmer · 오후 5:11 · 2021년 7월 21일 · Twitter Web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