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 품사
  • 2023. 9. 12. 13:06
1월

 나라서 안 된다면 책임전가를 할 생각이야.


 "저런, 불쌍한 살리에리."

 세상에, 불쌍하다니요? 살리에리는 그만 시선을 떨굴 수밖에 없었어요. 의미 없는 격려 따위는 필요 없다고 자신이 먼저 윽박지르긴 했었지만, 이렇게까지 몰아갈 필요는 또 없지 않냐는 듯이 퉁명스럽게 입을 비죽거리기도 해보네요. 자신의 체격만큼이나 자그마한 발버둥인가요.

 "이번엔 또 뭐가..."

 "저번과 똑같아. 당신의 곡에서는 여전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보통 그런 걸 불감증이라고 하지 않나?"

 "글쎄요. 감勘도, 감각感覺도 잃어버리게 된 건 오히려 당신이 아닐까 싶은데."

 쇼팽은 그런 살리에리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요, 다행스럽게도 여전히 당신에게는 다음이 있다는 말과 함께. ...불 난 집에 부채질 하나요, 지금? 저보다 한참이나 높이 있는 그 손을 잔뜩 째려보고는 가볍게 쳐내는 살리에리. 짜증 내는 새끼고양이 같은 모습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마는 쇼팽을 뒤로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로 해요. 내 전부를 파헤쳤다는 듯이 부드럽게 웃지 마, 쇼팽. ...말을 꿀꺽 삼키고는 발걸음을 옮겨요.

 도망치듯 복도를 빠져나와 방으로 들어온 살리에리. 커튼이 쳐져 있어 한차례 걸러진 햇빛만이 적막한 방을 채우고 있네요. 이 공간마저 그의 심경을 건드리는 것만 같아요. 그에겐, 한차례 걸러 들어올 햇빛조차 없는데. 이런 그가 지금,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도저히 곡을 쓸 기분이 아니네요. 그렇다고 잠을 자고 싶은 것은 또 아니에요. 무거워진 다리를 침대 근처까지 겨우 끌고 와서, 문득 생각해요.

 '막연하게 사랑받고 싶은 기분일 때 다른 유닛들은, 그 붉은 꽃은 대체 어떻게 할까?'

 아마 지금쯤 대합실에서 쇼팽이 타준 밀크티의 달콤함에 대해 진지하고도 발랄한 토의를 하고 있겠죠. 각양각색의 목소리들이 무색해질 정도로 붉은 꽃의 목소리가 가장 높고도 독특할 거예요. 밉지만 싫어할 수 없는 목소리, 정열을 노래할 줄 아는 재능, 대충 그런 것들을 보고 유닛들은 사랑스럽다고 하나 봐요. 아, 그런 거라면... 그런 칭호는 원래 전부 그의 것이었어요. 멋대로 뺏어가 놓고 사과 한마디 없는 그 꽃을 어떻게 그렇게까지 칭송해줄 수 있는 건가요? 무기력과 증오, 조금의 순수한 부러움이 엎치락뒤치락하며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요. 거리를 둬봤자 손해인 것은 오히려 그이기 때문에 방문을 걸어 잠글 수조차 없어요. 세상이 당신에게 정말 너무하는군요, 저라도 당신의 이름을 불러드릴게요. 불쌍한, 살리에리.

 낯가림이 심하고 사교성이 떨어지는 살리에리와 달리, 앨리스 내에서 SNS 스타로 활동하고 있는 쇼팽은 불쌍한 그를 위해 어느 날부터 소식통의 역할을 맡아주고 있어요. 유닛들 사이에서 요즘 유행하는 것들처럼 자잘한 정보부터, 요즈음에 여왕을 잠재울 적합자가 나타났다는 중대한 정보까지. 아뇨, 살리에리가 원하는 정보는 따로 있어요, 알잖아요. 그런데도 모르는 척, 안달 날 정도로만 정보를 주는 쇼팽의 그 검은 속을 정말 살리에리만 아는 것일까요? 사람 좋은 척하긴. 아무리 살리에리라고 해도 처음부터 그 붉은 꽃을 미워한 건 아니란 말이에요(걱정하지 말아요, 살리에리. 적어도 나는 당신의 편이에요).

 붉은 꽃, 말 그대로 혜성처럼 등장해서는 위태로운 살리에리의 마음을 있는 대로 휘저어 놓았어요. 이상하리만치도 사랑스러운 그 꽃은 살리에리에게 없는 모든 것을 갖고 있어요. 결핍된 것에 대한 허전함과 그것을 보란 듯이 해소해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 그러면서도 괜스레 피어오르는 질투는 지금의 불쌍한 살리에리의 전부예요. 어쩌면 쇼팽은 이런 살리에리를 바랐을지도 몰라요. 이전의 살리에리는 너무나도 자만심에 빠져있었거든! 당신의 이름 대신 그 꽃의 이름만이 들리게 된 것은 대체 언제부터였죠, 살리에리? 그런 것까지 저에게 묻지 말아요, 당신이 제대로 떠올려서 똑바로 삼키란 말이야. 그 이름 앞에 당당해지지 못한 꼴이 참으로 가련하네요! 그런 태도의 당신을, 대체 누가 기억하고 싶겠어요? 조롱하는 듯 그 입을 꾹 다물고서, 더할 나위 없이 순하게 웃는 쇼팽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도대체 왜일까요.

 추측만 하던 목소리가 직접 고막을 울리는 듯한 감각에, 살리에리는 정신을 차려요. 지독한 것, 독백할 시간 정도는 방해하지 않아도 괜찮잖아. ...아이러니하게도 살리에리는 그 꽃과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제대로 대면해본 적이 없어요. 늘 꽃이 먼저 다가오면, 늘 살리에리가 피했거든요. 도망쳤다고 하는 게 맞겠죠? 그의 음악은 언제나 살리에리의 동기부여가 되지만, 정작 목소리를 비롯한 다른 모든 것은 겨우 살리에리의 추측일 뿐이에요. 가여운 살리에리, 내가 왜 걔랑 대화해야 해? 하면서도 쇼팽이 주는 그 꽃의 정보라면 사족을 못 쓰죠. 어디 가서도 거짓말은 못 하겠네요. 아, 티타임이 드디어 끝났나 보네요. 어서 와, 쇼팽. 살갑게 맞이하는 것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군요.

 "살리에리, 모차르트는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요. 언제나 당신에게 열린 마음으ㄹ..."

 "그런 설교는 나중에 해. 밀크티 얘기도 필요 없어. 본론부터 말해."

 "바깥에 나가자는 게 제 본론이에요. 왜 그 말괄량이가 모두의 아이돌처럼 활동하고 있는지 당신 눈으로. ... 이것만 전해드리려고 왔어요."

 "이 초라한 꼴을 비웃는 그 화려한 얼굴을, 내 눈으로 직접 보라고?"

 "하다못해 이젠 듣는 법마저 잃어버리셨네요."

 "..."

 "10월에 콘서트가 열려요, 모차르트의."

 "... 왜 알려주는 거야. ...거기 참석해서 바보 같이 박수나 치고 있으라고?"

 "글쎄, 좀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나요? 그렇게 울적하게 있을 때가 아닐 텐데."

 익숙한 듯 커튼을 걷어내는 쇼팽. 빛이 쏟아져 내리자 눈이 부신지 살리에리가 얼굴을 찡그려요.

 "혼자 할 수 없으면, 다른 유닛과 함께하면 되겠죠."

 녹색만이 남아있는 자신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아하니 역시 쇼팽은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가고, 뒤이어 자신 혼자서는 역시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공포감이 엄습해요. 쇼팽이 알았다면 분명 지금까지 더한 곡도 써왔으면서 인제 와서 답지 않게 내숭 떨지 말라고 했겠죠. 하지만, 혼자서는 할 수 없다는 것도, 그런 자신을 그가 도와주지 않을 것도 살리에리는 잘 알고 있어요. 살리에리는 쇼팽과 달리 인기가 많지도 않고, 다른 유닛을 능숙하게 다룰 줄도 모르는 데다가, 협력하는 방법조차 제대로 모르는걸요. 쇼팽이 나가고 조용히 닫힌 방문. 결국 혼자 남겨진 것은 또다시 살리에리인데. 이런 살리에리에게,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든 그게 옳은 방법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해 줄 유닛도 없을 정도니 말 다 했죠.

 목표를 잡은 살리에리. 쇼팽이 예상한 대로 흘러가면 참 좋을 텐데요.

 1월의 꽃샘추위가 창문을 흔들자, 귀찮다는 듯이 다시 커튼을 쳐버리는 그 손이 작게 떨리는 것을 살리에리는 과연 눈치챘을까요. 앞으로 9개월.

[백업] 野情

한 다리 건너 듣는 네 소식이 그리도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방 안을 가득 메우던 타자기 소리가 멈추었다. 사전예고 없이 다가온 정적은 몇 번을 겪어도 적응할 수 없었다. 움직여야만 하는 이유뿐인데도 멍청한 건지, 자각하지 못한 건지 미련할 정도로 움직이지 않는 손끝에 피곤함에 절은 시선을 내던진다. 마스크를 사이에 두고 부끄러움에 내뱉은 숨이 오늘따라 유독 답답하게 느껴진다.

 여왕의 폭주라느니 적합자의 구원 서사라느니 그런 건 전우치에게 전혀 흥밋거리가 되지 못했다.
자신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관심 밖의 일이었다. 오로지 타인의 속을 파먹으며 살기 바빴다. 사부님의 검엔 희뿌연 먼지가 쌓인 지 오래다. 언제부터 틀어졌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로그를 뒤져봐도 그 무엇도 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누렸던 재능이 무색할 정도가 되었다. 전혀 움직이지 않아 보기 흉측하게 말라버린 팔을 보고 있자면 이상하게도 그가 떠오르고, 입으로 내봐도 나오는 것은 그가 듣기 좋아했던 말들뿐이다. 제 로그의 모든 것이 바보처럼 보인다. 그 가운데 그가 있었다. 인정할 수 없는 분한 기분, 전우치는 다만 쓰레기로 가득한 책상을 내리친다.

 "알고 있는가, 지킬 수 없는 꽃이야말로 예쁜 법이다."

 붉은 머리의 꽃감관이 필사적으로 지키던 꽃밭에서, 애처로이 울던 그가 뱉은 혼잣말을 전우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휘날리던 색이 다른 양갈래의 머리카락과 사이로 보이던 새하얀 목덜미, 울분에 젖어 가냘프게 떨리던 손끝 하나하나까지... 그의 신체의 모든 것은 이제, 바람을 타고 무겁게 떨어지던 진정성 가득한 눈물에 섞여 전우치의 애절함이 되었다. 벽 한 면을 가득 채우고도 부족한지 매일 솟아나는 두려움과 그리움의 근원이 되었다. 폭풍우처럼 몰아치던 그의 감정은 여전히 불씨로 남아 전우치의 낮을 괴롭히고 밤을 늦어지게 하며 새벽의 말동무가 되어주고 있다. 도저히 끊어낼 수 없이 피어오르는 망상에 침전하는 지금의 전우치의, 해 질 녘은 오롯이 그의 것이다.

 "♪"

 바탕화면 오른쪽 모서리에서 작은 창이 하나 났다. 그에게서 온 메일이다. 책상 앞으로 달려오는 와중에 언제 버렸는지 모를 과자 봉지를 밟고 넘어질 뻔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시선을 그 메일 알림에서 떼지 않는 것이 그가 보면 안쓰럽다고 한 소리 했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마스크 속 전우치의 숨이 더 진해진다. 마우스를 달칵였다. 다급하게 움직이는 손끝이 이제는 조금 야속하기도 하다. 터질 듯 고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보낸 문자에 대한 답변이라고 하기에는 소박한 그의 대답. 두 줄 남짓한 것이 변함없이 늙다리 아가씨의 꾸지람이다. 이것이 전우치를 더 안심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아이러니다. 그는 전우치의 입가에 기분 나쁜 미소가 번지는 것을 참을 수 없게 한다.

 걱정 좀 시켜볼까, 하면서도 불안감을 대놓고 감추기 위해 화면을 끈다. 도피하고 싶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커튼 사이로 불어 들어오는 그의 색을 품에 안는다. 이렇게 하고 있으면 제가 그의 곁에 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눈을 감고 이리저리 그의 로그를 훑어본다. 아가씨 혼자서도 잘 해내는 모습을 보니 얄미우면서도 더욱더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오늘 황혼도 그와 함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