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업] 野情

한 다리 건너 듣는 네 소식이 그리도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방 안을 가득 메우던 타자기 소리가 멈추었다. 사전예고 없이 다가온 정적은 몇 번을 겪어도 적응할 수 없었다. 움직여야만 하는 이유뿐인데도 멍청한 건지, 자각하지 못한 건지 미련할 정도로 움직이지 않는 손끝에 피곤함에 절은 시선을 내던진다. 마스크를 사이에 두고 부끄러움에 내뱉은 숨이 오늘따라 유독 답답하게 느껴진다.

 여왕의 폭주라느니 적합자의 구원 서사라느니 그런 건 전우치에게 전혀 흥밋거리가 되지 못했다.
자신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관심 밖의 일이었다. 오로지 타인의 속을 파먹으며 살기 바빴다. 사부님의 검엔 희뿌연 먼지가 쌓인 지 오래다. 언제부터 틀어졌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로그를 뒤져봐도 그 무엇도 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누렸던 재능이 무색할 정도가 되었다. 전혀 움직이지 않아 보기 흉측하게 말라버린 팔을 보고 있자면 이상하게도 그가 떠오르고, 입으로 내봐도 나오는 것은 그가 듣기 좋아했던 말들뿐이다. 제 로그의 모든 것이 바보처럼 보인다. 그 가운데 그가 있었다. 인정할 수 없는 분한 기분, 전우치는 다만 쓰레기로 가득한 책상을 내리친다.

 "알고 있는가, 지킬 수 없는 꽃이야말로 예쁜 법이다."

 붉은 머리의 꽃감관이 필사적으로 지키던 꽃밭에서, 애처로이 울던 그가 뱉은 혼잣말을 전우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휘날리던 색이 다른 양갈래의 머리카락과 사이로 보이던 새하얀 목덜미, 울분에 젖어 가냘프게 떨리던 손끝 하나하나까지... 그의 신체의 모든 것은 이제, 바람을 타고 무겁게 떨어지던 진정성 가득한 눈물에 섞여 전우치의 애절함이 되었다. 벽 한 면을 가득 채우고도 부족한지 매일 솟아나는 두려움과 그리움의 근원이 되었다. 폭풍우처럼 몰아치던 그의 감정은 여전히 불씨로 남아 전우치의 낮을 괴롭히고 밤을 늦어지게 하며 새벽의 말동무가 되어주고 있다. 도저히 끊어낼 수 없이 피어오르는 망상에 침전하는 지금의 전우치의, 해 질 녘은 오롯이 그의 것이다.

 "♪"

 바탕화면 오른쪽 모서리에서 작은 창이 하나 났다. 그에게서 온 메일이다. 책상 앞으로 달려오는 와중에 언제 버렸는지 모를 과자 봉지를 밟고 넘어질 뻔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시선을 그 메일 알림에서 떼지 않는 것이 그가 보면 안쓰럽다고 한 소리 했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마스크 속 전우치의 숨이 더 진해진다. 마우스를 달칵였다. 다급하게 움직이는 손끝이 이제는 조금 야속하기도 하다. 터질 듯 고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보낸 문자에 대한 답변이라고 하기에는 소박한 그의 대답. 두 줄 남짓한 것이 변함없이 늙다리 아가씨의 꾸지람이다. 이것이 전우치를 더 안심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아이러니다. 그는 전우치의 입가에 기분 나쁜 미소가 번지는 것을 참을 수 없게 한다.

 걱정 좀 시켜볼까, 하면서도 불안감을 대놓고 감추기 위해 화면을 끈다. 도피하고 싶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커튼 사이로 불어 들어오는 그의 색을 품에 안는다. 이렇게 하고 있으면 제가 그의 곁에 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눈을 감고 이리저리 그의 로그를 훑어본다. 아가씨 혼자서도 잘 해내는 모습을 보니 얄미우면서도 더욱더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오늘 황혼도 그와 함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