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사랑했기 때문에 패배한 겁니다.
죽음을, 준비하라.

 고고한 분노가 다시 한번 세계를 향해 울린다.

 카운터펠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이는 제 무기를 고쳐 쥐었다. 단추 크기 정도 되는, 그의 작은 눈에 두려움이란 한 점도 없었다. 되레 입꼬리를 당겨 웃는 것 같았다. 어디 사는 누구 씨의 피조물인데 이 정도는 해줘야 족하지 않겠는가.


 가이는 창조된 세계, 그 자체였다. 퇴락해가는 부분이 있지만, 더욱 성장한 부분이 있다는 점마저 그는 꼭 세계를 닮았다. 멸망 앞에 놓인 세계는 카운터펠트보다도 빠르게 움직였다. 살고자 하는 세계의 본능은 카운터펠트로 하여금 가이를 원하게 했고, 부수게 했다. 삶에 대한 염원은 제아무리 창조주라고 한들 손쓸 수 없는 구역인가. 창조주에게 있어 세계는 그런 존재였다. 유일신 창조주인 자신을 의심케 만드는 피조물. 물론, 그는 저런 의구심이 들 때마다 '역시, 스탯을 너무 많은 줘버렸군. 주사위 따위를 굴리는 게 아니었는데.' 하며 금방 생각을 고쳐먹었다. 콧방귀를 뀌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이럴수록, 실패한 창조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선명해지고는 했다. 저 좆만하고도 소중한, 카운터펠트의 오랜 친구는 지금껏 세계의 수호자들을 몇 번이고 웃기고 울렸다. 세계를 관통하는 존재였을 카운터펠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것이 가이를 반드시 파멸시켜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 누가 카운터펠트를 이전처럼 두려워하고 경외할 수 있을까.

 "구스타브 카운터펠트의 패배는 필연이었지."

 세계의 중심이자 가이의 중심에는 이런 믿음이 있었다. 가이는 '베스트 가이'가 되기 위해 망토를 두르고, 무기를 쥐어든 것이 아니었던가. 창조주의 필패와 세계의 필승은, 그런 가이를 앞에 둔 카운터펠트가 인간의 몸을 입었다는 데서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인간을 상대하기 위해 그들의 몸을 받아 지상으로 내려오는 창조주는, 신을 능가하려는 욕심에 잡아먹히고야 만다. 창조주 자신보다 세계가 더욱더 악함을 인정하지 못해서 패배한 것일까? 아니면 이기고자 하는 욕심이 인간보다 적어서 패배한 것일까?
모순적이지만 이미 인간은 카운터펠트의 패배 이전에, 또 다른 전지전능한 창조주에게 패배를 안겨준 적이 있다. 카운터펠트가 조그마한 따발총에 죽어갈 때, 그는 간지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창조주들은 인간을 필요 이상으로 사랑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필요 이상의 스탯을 부여했고, 필요 이상으로 그들에게 마음을 주었다. 누구는 인류를 파멸시키려 했으나 다정했고, 누구는 애초부터 인류를 구원하고자 이 땅에 내려왔다.
더 사랑하는 쪽이 진다고들 하지 않던가. 카운터펠트는 이미 이 땅에 다녀갔다는 그와 같았다. 전지전능한 유일신 구스타브 카운터펠트는, 인간을 이기지 못한 게 아니라 사랑에 이기지 못한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대적자인 가이에게 피아노를 연주해주기 위해 편곡하고 연습했을 점과 자신의 공격을 피할 수 있을 만한 구역을 미리 알려준다는 점에서는 꼭 그렇게 보였다.
게다가 '죽음을 준비하라'라니. 꼭 가이의 죽음을 손수 인도해주고,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기까지 할 것 같지 않은가(아니더라도 그렇다고 하자... 전지전능 유일신 이異능력 탈취 및 조작이 가능한 창조주가 고작 따발총 들고 있는 꼬마의 총탄 몇백 대를 고스란히 맞아서 네 번이나 행성 밖으로 쫓겨났다는 게 말이나 되는지 카운터펠트한테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베켓의 신호에 맞춰, 피아노 건반을 놀리고 있던 카운터펠트는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한숨을 뱉었다. 그래, 결국 사랑에 져버린 창조주는 손쓸 새도 없이 두 번이나 패배해주었다. 그러나 창조주를 세계 밖으로 쫓아냈다고 한들, 인간은 인간이었고 승리의 결과가 언제나 달콤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 번의 승리로 몇 번의 재앙을 불러올 뿐이라면 패배하는 것이 오히려 승리하는 것이지만, 되고자 하는 욕망은 가이의 눈을 가려버렸다. 결국 무너져가는 세계를 포기할 수 없어 가이는 저 자신을 더욱 끌어안게 되었으니, 악에 받친 인간이란 사탄보다 무서운 것이었다.

 가이의 존재는 카운터펠트에게 있어서 언제나 모순이었다. 제거하기 위해 창조하였고, 창조하였으므로 제거해야 했다. 그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준 카운터펠트의 목숨을 그는 앗아버리려 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구스타브 카운터펠트의 희망이자 절망이었다. 그야말로 인간다웠다.
 하지만, 가이 또한 카운터펠트에게 할말이 많았다. 수호자들을 대신 제압해주었더니, 창조주라는 놈이 은혜도 모른 채 제게 온갖 공격을 퍼부어댔으니 말이다. 두 번 쫓겨났으면 됐지,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다시 왔느냐며 따질 만도 하겠다마는 시종일관 웃는 얼굴.
카운터펠트는 그런 가이의 변하지 않는 표정에 오히려 피로함을 느꼈다. 사랑이니 뭐니 했지만, 저 얼굴을 보면 짜증이 나고야 마는 건 어쩔 수 없잖은가. 베켓처럼 얌전히 사라져주면 좀 좋았을까 하며 뒷머리를 긁적인다.

 어디 보자, '당신'이 보기 좋게 측면에 서 있자니 극의 막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제 손목을 보며 옷매무새를 다듬던 카운터펠트였지만, 당연하게도 가이와의 악수 따위는 없었다. 가이도 무기를 다시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뗐을 뿐이었다.
세 번째 만남이었지만 긴장감은 처음보다 더욱 고조되어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바라며, 베스트 가이는 고개를 들어 드림 이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기 사는 아무개 씨였다면 저 작은 피조물에게 쫄지 말라고 했겠지만, 카운터펠트는 달랐다. 좀 쫄아 보라고 으름장 놓고 싶은 마음을 삼켜버렸다. 대신, 다시는 만날 일이 없으리라고 선언하기로 했다.

 "죽음을, 준비하라."

 고고한 분노가 다시 한번 세계를 향해 울린다.

 카운터펠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이는 제 무기를 고쳐 쥐었다. 단추 크기 정도 되는, 그의 작은 눈에 두려움이란 한 점도 없었다. 되레 입꼬리를 당겨 웃는 것 같았다. 어디 사는 누구 씨의 피조물인데 이 정도는 해줘야 족하지 않겠는가.

 카운터펠트는 그동안 수호자들에게서 갈취해왔던 힘을, 할 수 있는 한 효율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방출해내야 했었다. 그동안 짜 놓았던 행동 루트를 기계적으로 실행해나갔다. 피할 수 있을 자리와 발판 등을 만들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랑보다는, 정정당당하게 이기고 싶었던 것뿐이라고 일축하기로 했다. 잡음에 집중해서는 안 되었다. 상대는 세계이니까.
그러나 중력을 반전시키고, 그의 발자취마다 폭발을 일으켜도 그 작은 몸은 좀처럼 쓰러져주지 않았다. 예상은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언제까지 이 꼬마의 놀이 상대로 있을 수는 없잖은가! 이걸로, 정말 끝을 내야 했다.

 그 순간이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선언은, 되려 카운터펠트의 죽음을 예견한 꼴이 되었다. 분노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릇은 결국 깨지고 말았다. 몸이 제 말을 듣지 않았다. 양복이 답지 않게 흐트러지는 것이 보였다. 카운터펠트가 땅을 딛고 서 있자니, 가이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세상을 비추고 있던 창조주의 눈에는 오직 가이만이 비치고 있었다.
다른 건 모두 멸망한 곳에서 왜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가.
분노가 가라앉는 듯싶더니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뜨거움이 속에서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카운터펠트는 눈을 크게 떴다. 감정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기하며 제 입에 고인 피를 모아 뱉어낸 뒤, 옷매무새를 다시 다듬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의 침묵이 감돌았다. 이렇다 할 말도 없이 카운터펠트가 있던 곳에는 어느새 눈을 찌르는 듯한 섬광만이 자리하였다. 폭발음이 시작되자 가이는 작은 손으로 제 귀를 감싸고 바닥에 엎드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수호자 중 한 명이 바닥에 쓰러진 가이를 일으켜 세웠다. 또 다시 세계가 이겼다고 선포해주었다. 그러나 가이는 전혀 후련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후퇴할 거였으면, 이 세계를 포기하고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면 그만이지 않은가. 아니면, 가이 자신의 세이빙 능력을 탈취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가이는 최선을 다해 움직인 자신의 노력이 무색해짐을 느꼈다. 먹구름은 걷혔지만, 쌍무지개가 뜨지 않았다.


 창조주는, 마지막 탄환을 제 가슴에 제대로 명중시켜준 피조물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구스타브 카운터펠트는 세계를 위한 유일한 존재였고, 동시에 세계로부터 미움받은 유일한 존재였다. 창조할 줄 아는 자란 해야 할 일이 있는 자이기 때문에, 그는 갈등의 중심에서 악역을 자처해야만 하는 노릇이었다. 스나이퍼를 사랑하는 빌런은 그냥 호구에 불과하지만... 카운터펠트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감정은 사랑임이 분명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