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점들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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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6. 15. 11:51

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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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6. 14. 22:37
IWRTG; I Wanna Return To Gustav - 前

 "아오... 씨발. 타케 이 똥쟁이 새끼야. 술 다 처먹었으면 치우고 꺼져."

 구스타브Gustav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뒷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정강이에 반복해서 일어나는 통증은 생각보다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술을 진탕 마셔 제 속이 제 것이 아닌 자에겐 더더욱. 깊은 짜증이 몰려왔다. '옳거니, 씨발! 망치로 저 새끼의 대가리를 후드러까야 다시 잠을 잘 수 있겠구나!' 구스타브는 눈도 제대로 다 못 뜬 채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긴 했는데......

 그의 눈앞에는 술주정을 부리는 타케 이테아시 대신,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아담한 키를 가진 꼬마가 놓여 있었다. 어찌나 아담한지, 구스타브의 정강이를 다 넘지 못한 부근에서 꼬마의 푸른 모자가 보였다. 챙이 넓은 모자였기에, 그의 얼굴은 반대로 잘 보이지 않았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분명 구스타브는 생각보다 깨끗한 집에서 똥쟁이 하나에 황제 하나와 함께 '적시고' 있었다. 타케 이테아시가 주는 잔을 마지막으로 하고, 이제 상을 무르자고 말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어쨌거나 지금 그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여긴 자기가 술판을 벌이던 그 집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여긴 어디고 이건 대체 뭔가, 하니......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애초에 제 관할 구역이 아닌 것 같았다.

 "뭐냐, 이 만들다 만 것 같이 생긴 스프라이트는."

 "......"

 탕, 탕, 탕, 탕. 익숙한 통증이 느껴진다. 꼬마는 대답도 않은 채, 구스타브의 정강이를 향해 총탄 네 발을 발사했다. 정확히는, 그 높이가 꼬마의 최선이었다.

 "내 정강이를 후드러까든 나발을 하든 통성명은 하고 나서 해야 하지 않겠니? 이 필멸자 새끼야."

 "......"

 통성명을 하자는 말에도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구스타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우리의 창조주 구스타브에게도 인내심의 한계라는 것이 존재할 터. 더군다나 그는 지금 속이 충분히 쓰린 상태였다.

 "내가 지금 속이 안 좋거든? 뒤지기 싫으면 적당히 해라."

 "......?"

 탕...

 총소리가 잦아들었다. 끝까지 얼굴 한번 보이지 않던 꼬마가, 천천히 모자를 매만진다. 곧이어 그들은 처음으로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처음 보는 소년의 얼굴은, 그 또래 나잇대의 아이가 가지고 있지 않을 만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윽고 그런 꼬마의 얼굴에 '물음표'로 가득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 표정에 구스타브의 헛웃음이 화답했다.
 구스타브에게는 이 공간 자체보다도, 조그만 반항아의 행실이 더 흥미로웠다. 설마 그 총 같지도 않은 총으로 자신을 공격했을 줄이야. 그럼에도 꼬마의 눈빛에는 진심이 어려있었다. 아무리 구스타브라고 한들, 그런 눈빛에 대놓고 네 총알에 의해 입은 대미지보다, 내 숙취와 위통으로 입은 대미지가 더 크겠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카운터펠트Counterfelt가 제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음을 가이는 잘 알고 있었다. 새로운 공격 패턴인 것일까. 가까이 가면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창조주인지 뭔지가 정말 속이 안 좋아서 헛소리를 뱉는 건 아닐까. 어느새 가이의 얼굴엔 그런 의심 어린 걱정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이상한 카운터펠트'에게로 다가가려고 했다. 막말로, 자신은 죽어도 'R'키 하나면 그만이니까.

 꼬마가 조그마한 발을 내딛은 그 순간, 다시금 총성이 울렸다.

 총성의 시발점은 꼬마의 손에 들려있던 총이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었다. 미니어처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작은 총은, 적은 충격에도 튀어 오르듯 굴러다니기에 충분했다. 오발탄은 재수 없게도 제 주인을 향했다. 비비탄과 비슷한 크기의 총알이 그의 다리를 관통했다. 바닥으로 쓰러지는가 싶던 꼬마는,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니지, 피를 사방으로 흩뿌리며 사라졌으니 '흔적'이 남기는 했다.

 엥.

 구스타브의 입에서는 외마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저 작은 애가 자기보다 더 작은 총을 떨어뜨렸고, 그 안에서 그것보다 더 작은 총알이 나왔는데... 지금 저 조그마한 걸 맞고 죽은 거라고?
 이게 말이 되는지 어떤지를 떠나서, 여기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님을 구스타브는 육감으로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게임 내 모든 생명체의 생사를 관장하는, 세계의 제작자는 저 꼬마와 초면이었다. 게다가 그의 사망을 명령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제멋대로 죽어버릴 수가 있을까. 혼란스러웠다. 야속하게도, 꼬마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그의 눈앞에 돌아와 있었다. 안 그래도 과음한 탓에 속이 쓰린 상태인데, 비위 상하는...
 엥, 잠깐만. 눈앞에 돌아와 있다고? 헐, 씨발. 진짜네. 구스타브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제 입을 가리고야 말았다. 이 새끼, 뭐지?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꼬마는 제 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여차하면 제 앞에 있는 양복 입은 남자를 조지고 튈 셈인 듯했다. 딱 보니까 각이 나온다.

 "너... 뭐냐?"

 "......"

 꼬마 또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베켓Becket의 워프 게이트 시스템을 통해 자신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건만, 게이트 속에서 걸어 나온 것은 웬 카운터펠트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다음이었다.
카운터펠트는 가이를 공격하지 않았다. 카운터펠트를 향해 아무리 가까이 다가간다고 한들, 체력 바와 이름을 볼 수 없었으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카운터펠트는 이 모든 것들을 처음 본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따라 총도 가이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가 일생동안 한 번도 손에서 놓쳐본 적이 없던 것이었기에 더욱 믿을 수 없었다. 급기야 그것은 가이가 얼마나 쉽게 죽는지를 첫 대면한 자 앞에서 몸소 보여주게끔 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의 반복이었다.

 자신의 목표가 이 '이상한 카운터펠트'가 아니란 걸 깨달은 듯이, 꼬마는 무기를 고쳐 잡았다. 그는 게이트를 빠져나와 빠르게 사방을 둘러봤다. 그 모습은 사뭇 진지해 보이기까지 했다. 곧이어 그는 구스타브를 등지고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백발의 청년 쪽으로 다가갔다. 그 청년은 허망한 표정으로, 컴퓨터처럼 보이는 무엇들을 마구 조작하고 있었다. 그 또한 꼬마와 마찬가지로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구스타브는 고개를 갸웃거리고야 말았다. 저 꼬마가 자신을 공격한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다른 캐릭터랑 자신을 혼동했다든지, 뭐 그런 것들 말이다....... 그렇다고 한들, 아무리 짱구를 굴려봐도 저 녀석들은 도대체가 입을 열어 줄 생각을 않는다.
 어떻게 해야 돌아갈 수 있지?
 곧 멸망할 것 같은 이딴 곳에서 술도 없이 여생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알딸딸하니 정신도 없어서 그냥 잠이나 자러 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정말 그런 장난이나 칠 때가 아니었다.
자신이 관장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의 구스타브는 그저 양복남 1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사실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지금 말 그대로 똥줄 타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는 '염병할... 그 똥쟁이 새끼가 주는 술을 또 받아 처먹으면 난 창조주가 아니라 폐급 피조물이다.'라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한번 저들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것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조그마한 꼬마의 뒤를 쫓으며 그는 입을 열었다.

 "뭐냐, 이게?"

 "......"

 "......"

 "아오, 이 답답한 새끼들."

 구스타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꼬마와 백발의 청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최종 보스가 보스전을 열지 않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숨 쉬듯 비속어를 구사하는 '이상한 카운터펠트'의 모습에, 가이는 불쾌함을 느꼈다. '이게 드디어 돌았나. 싸우기 싫으면 싸우기 싫다고 정정당당하게 말을 해야지'라는 생각이 가이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바쁜 사람이었다. 열망이 있고 꿈이 있는 자들이 늘 바삐 움직이듯, 가이 또한 그렇게 움직여왔다. 어쨌든, 더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뒤돌아 구스타브를 똑바로 쳐다봤다. 이번엔 가슴이 아니라, 머리에 한 대 쏴야 끝날 건가 싶어서.
 순간 위화감이 가이의 눈을 가리는 듯했다.
 그동안 가이의 눈에 비쳤던 카운터펠트라고 함은, 항상 옷매무새가 깔끔했었다. "카운터펠트가 폭력적이지 않았다면, 신사적이고 정중한 이미지로 타인의 호감을 샀을 것이다."라는 말은 한때 피조물들의 입버릇이었다. 그러나 지금 가이 앞에 서있는 '이상한 카운터펠트'는 조금 달랐다. 일단, 입이 그보다도 더 험했을 뿐만 아니라 양복도 대충 걸쳐 입은 듯한 모습이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심지어 술을 마시고 있었던 건지, 그의 곁에서는 술 냄새가 진동했다. 가장 중요한 건... 그의 아이덴티티처럼 보이던 넥타이가 없었다! 넥타이가 있던 곳엔 대충 풀어헤쳐진 칼라collar가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런저런 차이점들을 깨닫고 깜짝 놀란 꼬마는, 저도 모르게 2단 점프를 하고 말았다. 순식간에 제 키를 뛰어넘은 꼬마를 본 구스타브는 꼬마보다 더 놀라 아예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아니, 미친. 지가 무슨 벼룩인 줄 알아."

 "......!"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였다. 여긴 왜 왔는지, 당신은 누구인지, '진짜' 카운터펠트는 어디로 갔는지... 그러나 꼬마는 표정만 겨우 일그러뜨릴 수 있었을 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머릿속에서 뒤엉키듯 굴러다녔으나, 그뿐이었다. 입을 움직이거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기보다는 '대화창'을 띄울 수가 없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거 제작자가 너한테 대사를 안 넣어놔서 그래. 너도 방금 그런 생각 하지 않았어? 나도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

 의문을 가질 때쯤, 구스타브가 입을 열었다. 방금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느냐는 말을 할 적엔 고갯짓으로 청년을 가리켰으나,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꼬마는 알아듣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창조주도 아니고, 제작자라니?
 어쨌거나, 이제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바디랭귀지에도 한계가 있었다. 꼬마는 작은 총을 다시금 매만졌다. 차라리 벽에다 총을 쏴서, 벽이 팬 흔적으로 글씨를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이었으리라. 구스타브는 청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없는 것을 만드는 것보다, 있는 것을 활용하는 것이 더 쉬운 법이니까 말이다.
 영원 같던 침묵이 흐르고 있는 가운데, 무언가를 계속 타이핑하고 있던 청년이 모니터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는 천천히 구스타브와 눈을 마주쳤다. 청년이 금방이라도 말을 꺼낼 것처럼 입을 자꾸만 오물거리며 뜸을 들이자, 구스타브는 답답함에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한숨을 쉬며 눈치를 주지도 않았고, 내가 알아서 하겠다며 망치를 꺼내 들지도 않았다.
 이런 분위기는 베켓에게도 큰 곤욕이었다. 그는 자신이 벌인 일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애초에 하나부터 열까지 진실만을 나열한다고 한들, 가이가 믿어줄 리 없었다. 저 '카운터펠트를 닮은 자'는 이미 게이트 안에서 가이와 한 패를 먹은 것처럼 보였다. 이 자가 분명 카운터펠트와 닮았으나, 확연히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이 베켓을 꽤 괴롭게 했다. 차라리 능력 없는 학자라며 자신을 놀려댄 옛 수호자들이, 능력 없는 자신 대신 이 상황을 해결해줬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청년이 자신을 갉아먹는 생각의 굴레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그의 표정을 통해 온 세상이 알 수 있었다. 구스타브는 그를 보며 골치 아픈 타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오랜 -그래 봤자 2초였다- 고민 끝에 헛기침으로 청년을 깨우기로 했다. 자세를 잡는 구스타브의 모습에 가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쓰러진 자를 다시 때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 듯했다.
곧이어 우리에겐 아직 할일이 남아 있다는 듯 울리는 소리에, 청년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크흠, 제 이름은 베켓, 평범한 학자입니다. 점점 망해가고 있는 이 세상을 고치기 위해 연구 중이지요. 전 워프 게이트 시스템을 개발했고, 어... 음... 이쪽에 계신 Guy 씨를 그가 있던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드리려...... 했습니다. 그런데... 음..."

 침묵을 깨고 입을 연 백발의 청년, 그러니까 베켓은 말을 술술 잘하는가 싶더니, 뒤로 갈수록 우물쭈물하며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가이Guy라고 이름 불린 꼬마가 한숨을 내쉬며 그를 제 팔꿈치로 툭툭 건드렸다. 시선을 바닥으로 떨군 베켓은 헛기침을 한번 하곤, 곧 말을 이었다.

 "...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워프 게이트를 개발해낸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가이를 돌려보내려 한 게 아니라... 음, 원래 제 예상대로였다면, 당신이 아니라 구스타브 카운터펠트께서 이쪽 세계로 넘어오셨어야 했고, 그에 의해 인류는 패배했어야 했습니다. 또한 그에 의해 이 썩어빠진 세계는 정화되어야 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너 방금 뭐라 그랬냐?"

 "같은 설명을 또 해드리기엔..."

 "구스타브 카운터 뭐라고? 어쨌든 걔가 여기 예비 짱이라며. 내 이름도 구스타브인데, 난 안 돼?"

 구스타브의 말에, 베켓은 싸늘한 눈빛을 띠었다. 가이는 고개를 돌리고 있었지만, 아마 베켓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리라. 모두가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알았어, 새꺄. 농담이야, 농담. ㅎㅎ."

 "그런 농담은 나중에 하셔도 충분합니다. 당신이 어디에서 오신 구스타브이신지는 몰라도, 카운터펠트와 비슷한 위치에 계신 분이었다면 당신이 관장하던 세계는 지금쯤 꽤 큰 위기에 처해있을 것입니다."

 "상관없는데? 어차피 다 쓸어버리고 다시 만들려고 했음 ㅇㅇ."

 "......"

 듣다 못 한 가이가 구스타브를 향해 총을 한 발 발사했다. 아마도, 집중 좀 해달라는 의미였을 테다. 따끔한 한방에 구스타브는 총탄이 스친 곳을 문지르며 인상을 썼다.

 "하여튼, 돌아가면서 날 존나게 싫어하네."

 "당신께서 관장하던 그 세계는 상관없을지 몰라도, 카운터펠트는 이 세계에 있어 필수적인 존재이십니다. 당신과 그의 위치가 잘못되었으니, 각자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여기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각각의 세계가 파멸하는 속도는 더 빨라질 것입니다."

 베켓이 답지 않게 열을 올리며 말했다. 빠르게 굴려지는 단어들은 그가 얼마나 조급한지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 가이는 그런 베켓의 태도에 저도 모르게 뒤로 몸을 젖혔다. '그 분과의 재회'를 입에 올렸던 베켓의 모습이 떠올라 가이는 괜스레 소름이 돋았다. 그가 어느 정도로 세계의 구원을 갈구하고 있었는지를,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반면, 구스타브는 너무나도 의연한 모습이었다. 무슨 대단한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였던 것인지, 가벼운 허탈감에 그는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오냐, 그래. 알았다. 그래서 나 지금 보내준다고?"

 사뭇 거만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 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아보긴 뭘 알아봐. 네가 가장 마지막에 좌표 찍었던 곳이 내가 있던 세계겠지."

 "방금까지 그걸 알아봤습니다만, 제가 마지막으로 지정했던 워프 장소는 당신이 아니라 카운터펠트께서 계시던 장소가 확실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알아봐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카운터펠트가 아닌 당신이 이곳으로 온 이유가 도무지 짐작 가지 않기에..."

 "염병을 싸네 ㅡㅡ. 야, 비켜."

 베켓을 밀쳐낸 구스타브는 컴퓨터처럼 보이는 것들 앞에 무작정 앉아버렸다. 구스타브의 가벼운 터치에도 베켓은 힘없이 바닥으로 주저앉고야 말았다. 아마, 가이와의 전투로 인해 이미 체력이 다 소진되어 있던 탓이었으리라. 둘 사이엔 미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베켓은 금세 고개를 저으며 일어나 그를 말리려고 했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손까지 떨고 있었다. 가이는 그런 베켓과 구스타브를 번갈아 가며 지켜볼 뿐이었다.

 "뭐, 뭐를 어쩌실 셈입니까?! 함부로 만지지 마십시오!"

 "기차 화통을 삶아 드셨습니까? 창조주가 다 알아서 하니까, 닥치고 있어 보십시오."

 구스타브가 베켓을 놀리듯이 말하면서도, 빠르게 모니터 속 여러 글자를 읽어나가며 무언가 '조작'하고 있었다. 이 기계를 가장 많이 다루었을 베켓은 어딘가 놀란 표정으로 구스타브의 손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키가 '너무나도' 작아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할 수 없었던 가이는, 그들을 지켜보는 것 대신 자신이 들고 왔었던 아티팩트를 만지작거렸다.

 베켓은 처음부터 나를 속였고, 난 결국 이 자리에서 카운터펠트와 다시 한번 싸우게 될 것이 뻔했다. 왜 카운터펠트와 베켓 모두 날 속이려 한 것일까? 수호자들을 배반하고 세계를 다시 무로 돌리는 것이 정말 정당하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그렇게 행동했을까? 속이지 않고서는 나를 자신들의 편으로 돌릴 수 없는 것이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을 능가하는 창조주이자 유일신이라면 패배 앞에 더더욱 관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카운터펠트가 원하는 세계는...


 

 "...이. 가이! 안 들리십니까? 당장 그 구슬에서 손 떼십시오!"

 베켓의 찢어지는 듯한 고함이 가이의 생각을 가로막았다. 큰 소리에 놀란 가이는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고개를 몇 번 흔들어 정신을 차린 가이가 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급히 던졌다. 그 끝에는 다시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베켓의 뒷모습이 보였다. 구스타브는 이미 워프 게이트 앞에서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는 가이와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브이V 사인을 보내주었다.
 저 자신감에 넘치는 사인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이 복잡한 상황은 드디어 해결되었고, '이상한 카운터펠트'... 아니, 구스타브는 그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가이는 자신의 세상을 되찾은 구스타브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제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겠지, 하고 안도하는 표정으로 말이다.

 "뭘 손을 흔들고 자빠졌냐. 너도 가야지?"

 구스타브가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언하는 듯한 웅장함에, 베켓은 헛기침을 하고야 말았다.
가이는 구스타브의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다시금 총을 떨어뜨릴 뻔했지만, 기적적으로 정신을 다잡았다. 당황한 얼굴로 베켓을 쳐다보니, 그는 그냥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왜, 내가?' 하는 가이의 표정에, 구스타브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도와주면, 보답으로 네가 원래 있던 세계로 너를 다시 보내주는 걸 고려해보는 걸 생각해보는 걸 고민해보도록 하지."

 "......"

 가이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지금 보내주겠다는 건가, 말겠다는 건가. 하지만 여기 이렇게 서서 머리만 굴리고 있어 봤자,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차라리 뭐라도 실행에 옮기는 것이 몇 배는 더 나은 선택인 듯 보였다. 베켓과 구스타브가 했던 것처럼.
 그런 고민 끝에, 가이는 겨우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총을 재장전하며 말이다. 그가 마침내 구스타브의 곁에 다다르자, 베켓이 또 한 번 숨을 몰아쉬었다. 최종 세팅을 마친 천재 과학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가이에게 아티팩트를 제자리에 놓아달라고 말하기 직전에도, 베켓은 제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긴장하면 나오는 버릇인 듯 보였다. 그 모습이 꼭 카운터펠트와 닮았기에, 푸른 모자를 쓴 어린아이는 저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숨을 참고야 말았다.
 다시금 셋 가운데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구스타브는 슬슬 짜증이 몰려왔다. 무엇보다도 제가 모르는 둘 사이의 깊은 골이 있음을 구스타브 자신이 눈치챘다는 걸 견딜 수 없었다. 아, 다들 진짜 복잡하게도 산다. 모르긴 몰라도, 카운터어쩌고는 생각보다 예민한 존재일 것이다. 이 새끼들 하는 짓거리 좀 봐라. 그 자식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이미 안 봐도 비디오였다. 그는 불쾌감에 한숨을 쉬었다.

 "... 큼.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카운터펠트와 함께 가이 또한 반드시 이쪽 세계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그들은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습니다."

 엔터 버튼에 손을 올린 채, 베켓이 입을 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목소리였다.
그는 구스타브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가이는 베켓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구스타브는 느리게 눈을 꿈뻑일 뿐이었다.

 "음."

 구스타브의 대답 비슷한 것을 들은 베켓이 엔터 버튼을 누르자, 워프 게이트 시스템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다시금 작동하기 시작했다. 가이는 기분 나쁜 기시감에 총을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구스타브는 자신이 들어왔던 곳으로, 한치의 의심도 없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 순간, 나지막한 구스타브의 목소리가 베켓의 연구실을 가득 채웠다.

 "근데, 난 그런 거 잘 모르겠다. 뒤지는 것도 못 돌아오는 것도 그 새끼 운명이지요."

 "... 무슨...!"

 당황한 베켓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외마디 소리가 토해져 나왔다. 이미 작동해버린 워프 게이트를 다시 닫을 수도 없었다. '창조주의 구슬'은 어느새 가이의 손안에 들어가 있었다. 워프 게이트의 작동 방식을 눈치챈 구스타브가 가이에게 무언가 명령했음을 베켓이 깨닫게 된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하지만 도대체 왜, 어떻게?

 "간다.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

 이윽고 구스타브는 가이를 바닥에서 들어 올리다시피 안아 들었다. 두 사람은 한 사람의 발을 통해 워프 게이트 속으로 뛰어들었다. 베켓이 허겁지겁 달려와 게이트 안을 들여다본다고 한들 그 모습이 보일 리 없었다.
 백발의 천재 학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두 가지뿐이었다.
모두가 죽어버린 세상에 남겨진 자신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유일신이었던 구스타브 카운터펠트가 다른 세계에서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떨며 손톱을 뜯는 것.


後 - https://waiting4surnmer.tistory.com/10

구스타브 카운터펠트; 사망 시 출력 대사 정리

  • 품사
  • 2021. 6. 12. 16:22
더 사랑했기 때문에 패배한 겁니다.
죽음을, 준비하라.

 고고한 분노가 다시 한번 세계를 향해 울린다.

 카운터펠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이는 제 무기를 고쳐 쥐었다. 단추 크기 정도 되는, 그의 작은 눈에 두려움이란 한 점도 없었다. 되레 입꼬리를 당겨 웃는 것 같았다. 어디 사는 누구 씨의 피조물인데 이 정도는 해줘야 족하지 않겠는가.


 가이는 창조된 세계, 그 자체였다. 퇴락해가는 부분이 있지만, 더욱 성장한 부분이 있다는 점마저 그는 꼭 세계를 닮았다. 멸망 앞에 놓인 세계는 카운터펠트보다도 빠르게 움직였다. 살고자 하는 세계의 본능은 카운터펠트로 하여금 가이를 원하게 했고, 부수게 했다. 삶에 대한 염원은 제아무리 창조주라고 한들 손쓸 수 없는 구역인가. 창조주에게 있어 세계는 그런 존재였다. 유일신 창조주인 자신을 의심케 만드는 피조물. 물론, 그는 저런 의구심이 들 때마다 '역시, 스탯을 너무 많은 줘버렸군. 주사위 따위를 굴리는 게 아니었는데.' 하며 금방 생각을 고쳐먹었다. 콧방귀를 뀌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이럴수록, 실패한 창조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선명해지고는 했다. 저 좆만하고도 소중한, 카운터펠트의 오랜 친구는 지금껏 세계의 수호자들을 몇 번이고 웃기고 울렸다. 세계를 관통하는 존재였을 카운터펠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것이 가이를 반드시 파멸시켜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 누가 카운터펠트를 이전처럼 두려워하고 경외할 수 있을까.

 "구스타브 카운터펠트의 패배는 필연이었지."

 세계의 중심이자 가이의 중심에는 이런 믿음이 있었다. 가이는 '베스트 가이'가 되기 위해 망토를 두르고, 무기를 쥐어든 것이 아니었던가. 창조주의 필패와 세계의 필승은, 그런 가이를 앞에 둔 카운터펠트가 인간의 몸을 입었다는 데서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인간을 상대하기 위해 그들의 몸을 받아 지상으로 내려오는 창조주는, 신을 능가하려는 욕심에 잡아먹히고야 만다. 창조주 자신보다 세계가 더욱더 악함을 인정하지 못해서 패배한 것일까? 아니면 이기고자 하는 욕심이 인간보다 적어서 패배한 것일까?
모순적이지만 이미 인간은 카운터펠트의 패배 이전에, 또 다른 전지전능한 창조주에게 패배를 안겨준 적이 있다. 카운터펠트가 조그마한 따발총에 죽어갈 때, 그는 간지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창조주들은 인간을 필요 이상으로 사랑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필요 이상의 스탯을 부여했고, 필요 이상으로 그들에게 마음을 주었다. 누구는 인류를 파멸시키려 했으나 다정했고, 누구는 애초부터 인류를 구원하고자 이 땅에 내려왔다.
더 사랑하는 쪽이 진다고들 하지 않던가. 카운터펠트는 이미 이 땅에 다녀갔다는 그와 같았다. 전지전능한 유일신 구스타브 카운터펠트는, 인간을 이기지 못한 게 아니라 사랑에 이기지 못한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대적자인 가이에게 피아노를 연주해주기 위해 편곡하고 연습했을 점과 자신의 공격을 피할 수 있을 만한 구역을 미리 알려준다는 점에서는 꼭 그렇게 보였다.
게다가 '죽음을 준비하라'라니. 꼭 가이의 죽음을 손수 인도해주고,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기까지 할 것 같지 않은가(아니더라도 그렇다고 하자... 전지전능 유일신 이異능력 탈취 및 조작이 가능한 창조주가 고작 따발총 들고 있는 꼬마의 총탄 몇백 대를 고스란히 맞아서 네 번이나 행성 밖으로 쫓겨났다는 게 말이나 되는지 카운터펠트한테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베켓의 신호에 맞춰, 피아노 건반을 놀리고 있던 카운터펠트는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한숨을 뱉었다. 그래, 결국 사랑에 져버린 창조주는 손쓸 새도 없이 두 번이나 패배해주었다. 그러나 창조주를 세계 밖으로 쫓아냈다고 한들, 인간은 인간이었고 승리의 결과가 언제나 달콤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 번의 승리로 몇 번의 재앙을 불러올 뿐이라면 패배하는 것이 오히려 승리하는 것이지만, 되고자 하는 욕망은 가이의 눈을 가려버렸다. 결국 무너져가는 세계를 포기할 수 없어 가이는 저 자신을 더욱 끌어안게 되었으니, 악에 받친 인간이란 사탄보다 무서운 것이었다.

 가이의 존재는 카운터펠트에게 있어서 언제나 모순이었다. 제거하기 위해 창조하였고, 창조하였으므로 제거해야 했다. 그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준 카운터펠트의 목숨을 그는 앗아버리려 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구스타브 카운터펠트의 희망이자 절망이었다. 그야말로 인간다웠다.
 하지만, 가이 또한 카운터펠트에게 할말이 많았다. 수호자들을 대신 제압해주었더니, 창조주라는 놈이 은혜도 모른 채 제게 온갖 공격을 퍼부어댔으니 말이다. 두 번 쫓겨났으면 됐지,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다시 왔느냐며 따질 만도 하겠다마는 시종일관 웃는 얼굴.
카운터펠트는 그런 가이의 변하지 않는 표정에 오히려 피로함을 느꼈다. 사랑이니 뭐니 했지만, 저 얼굴을 보면 짜증이 나고야 마는 건 어쩔 수 없잖은가. 베켓처럼 얌전히 사라져주면 좀 좋았을까 하며 뒷머리를 긁적인다.

 어디 보자, '당신'이 보기 좋게 측면에 서 있자니 극의 막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제 손목을 보며 옷매무새를 다듬던 카운터펠트였지만, 당연하게도 가이와의 악수 따위는 없었다. 가이도 무기를 다시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뗐을 뿐이었다.
세 번째 만남이었지만 긴장감은 처음보다 더욱 고조되어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바라며, 베스트 가이는 고개를 들어 드림 이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기 사는 아무개 씨였다면 저 작은 피조물에게 쫄지 말라고 했겠지만, 카운터펠트는 달랐다. 좀 쫄아 보라고 으름장 놓고 싶은 마음을 삼켜버렸다. 대신, 다시는 만날 일이 없으리라고 선언하기로 했다.

 "죽음을, 준비하라."

 고고한 분노가 다시 한번 세계를 향해 울린다.

 카운터펠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이는 제 무기를 고쳐 쥐었다. 단추 크기 정도 되는, 그의 작은 눈에 두려움이란 한 점도 없었다. 되레 입꼬리를 당겨 웃는 것 같았다. 어디 사는 누구 씨의 피조물인데 이 정도는 해줘야 족하지 않겠는가.

 카운터펠트는 그동안 수호자들에게서 갈취해왔던 힘을, 할 수 있는 한 효율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방출해내야 했었다. 그동안 짜 놓았던 행동 루트를 기계적으로 실행해나갔다. 피할 수 있을 자리와 발판 등을 만들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랑보다는, 정정당당하게 이기고 싶었던 것뿐이라고 일축하기로 했다. 잡음에 집중해서는 안 되었다. 상대는 세계이니까.
그러나 중력을 반전시키고, 그의 발자취마다 폭발을 일으켜도 그 작은 몸은 좀처럼 쓰러져주지 않았다. 예상은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언제까지 이 꼬마의 놀이 상대로 있을 수는 없잖은가! 이걸로, 정말 끝을 내야 했다.

 그 순간이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선언은, 되려 카운터펠트의 죽음을 예견한 꼴이 되었다. 분노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릇은 결국 깨지고 말았다. 몸이 제 말을 듣지 않았다. 양복이 답지 않게 흐트러지는 것이 보였다. 카운터펠트가 땅을 딛고 서 있자니, 가이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세상을 비추고 있던 창조주의 눈에는 오직 가이만이 비치고 있었다.
다른 건 모두 멸망한 곳에서 왜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가.
분노가 가라앉는 듯싶더니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뜨거움이 속에서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카운터펠트는 눈을 크게 떴다. 감정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상기하며 제 입에 고인 피를 모아 뱉어낸 뒤, 옷매무새를 다시 다듬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의 침묵이 감돌았다. 이렇다 할 말도 없이 카운터펠트가 있던 곳에는 어느새 눈을 찌르는 듯한 섬광만이 자리하였다. 폭발음이 시작되자 가이는 작은 손으로 제 귀를 감싸고 바닥에 엎드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수호자 중 한 명이 바닥에 쓰러진 가이를 일으켜 세웠다. 또 다시 세계가 이겼다고 선포해주었다. 그러나 가이는 전혀 후련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후퇴할 거였으면, 이 세계를 포기하고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면 그만이지 않은가. 아니면, 가이 자신의 세이빙 능력을 탈취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가이는 최선을 다해 움직인 자신의 노력이 무색해짐을 느꼈다. 먹구름은 걷혔지만, 쌍무지개가 뜨지 않았다.


 창조주는, 마지막 탄환을 제 가슴에 제대로 명중시켜준 피조물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구스타브 카운터펠트는 세계를 위한 유일한 존재였고, 동시에 세계로부터 미움받은 유일한 존재였다. 창조할 줄 아는 자란 해야 할 일이 있는 자이기 때문에, 그는 갈등의 중심에서 악역을 자처해야만 하는 노릇이었다. 스나이퍼를 사랑하는 빌런은 그냥 호구에 불과하지만... 카운터펠트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감정은 사랑임이 분명했기에.